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처음 본 게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하다. 초등학생 때 막 나왔으니까 대충 2천년대 초중반 즈음이겠지. 소설 원작은 군대 있을 때 하도 심심해서 읽어보려고 했는데 막상 도서관에서 빌려오니까 흥미가 급속도로 식어버려서 덮었다. 피터 잭슨의 오리지널 3부작은 매우 좋아하는 편인데, 고3 때 수시 끝나고 3편을 연달아 보고 그 이후에도 OCN에 나오면 봤으니까 최소 서너 번은 본 것 같다. 얼마 전부터 아마존에서 TV 시리즈로 제작한다는 소식도 들려오는데 평가가 좋든 안 좋든 처음 한 번은 무조건 볼 생각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호빗 3부작은 처음 나오기 시작할 때부터 보고 싶은 마음이 안 들었다. 감독도 같고, 빌보 역을 맡은 마틴 프리먼도 좋은데 그냥 영화관에 가기 귀찮아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아무리 늦어도 내후년에는 드라마로 나올 테니 보긴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웨이브에 있길래 정주행했다. 10시간 동안을 안 쉬고 보니까 확실히 집중력도 떨어지고, 3편은 중간에 살짝 졸기도 했는데 몇몇 장면은 정말 감탄하면서 봤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든 건 1편의 고블린 동굴 장면이다. 작고 귀여운 고블린 친구들이 우글우글 몰려다니며 주인공 일행을 쫓다가 다리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그 느낌이 참 좋았다. 글로 적으니까 이상한데 실제로 보면 다들 무슨 말인지 이해할 거다. 드워프들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도 좋았고, 간달프는 그냥 클로즈업으로 얼굴만 잡아줘도 화면이 충실해졌다. 3편의 사랑 타령이랑 중간에 cg 예산이 다 떨어진 건가 싶은 전투 씬 하나만 제외하면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하루에 영화를 세 편이나 때린 반동인지, 또 한동안 영화를 안 보다가 어젯밤에 넷플릭스로 유전 을 봤다. 이 영화에 대해선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다. 너무 무섭다. 떠올리고 싶지가 않다. 같은 감독이 찍은 미드소마 도 (좋은 의미로) 참 좆같은 영화였지만, 이 영화는 정말 장면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불길하다. 감독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개인적인 일 때문에 더 무섭게 느껴졌던 건 주인공인 애니가 몽유병에 시달리는 장면인데 나도 초등학생 때 몽유병을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심각하게 시달리진 않았지만 지금 떠올려도 아찔한 순간이 한 번 있었다. 6학년 때 가족 여행으로 부산에 놀러 갔는데 엄마가 회를 먹고 탈이 나서 그날 일정을 다 취소하고 모텔에 들어가 쉬기로 했다. 침대에 누워 잠깐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처음 보는 길거리의 횡단보도에 서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상황 파악도 안 되고 그 전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던 터라 초6치곤 아주 꼴사납게 울고 있었는데, 그때 근처 공사 현장에서 일하시던 아저씨가 도와줘서 원래 있던 모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내가 밖에서 길을 잃었는지도 전혀 몰랐고 내가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나갔다나. 결국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지만, 어린 나에겐 꽤 충격적인 일이었다. 혹시라도 내가 잠든 사이에 다른 사람(특히 가족)을 해칠까봐 그게 참 무서웠다. 초딩이 누굴 해코지한들 얼마나 큰 일이 벌어지겠냐마는 내 몸과 의식을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인 공포였다.
몽유병 자체는 시간이 지나면서 없어졌지만, 이런 영화를 볼 때마다 그때 일이 다시 생각난다. 유전은 그 제목처럼 세대에 걸친 의식에 종속된 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면 소년기의 나도 사악한 존재가 파놓은 알 수 없는 함정에 빠졌던 걸지도. 오늘 점심은 순대국 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