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맨션’이 공개 1주년을 맞이했다. 돌이켜보면 이 앨범은 누구에게도 맞지 않는 옷이었고, 그래서 가위질 할 때의 즐거움이 배가 되었던 것 같다. 평소엔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너무 크거나 작은 옷가지들을 천조각이 될 때까지 해체한 다음, 필사적으로 기워서 옷 한 벌로 완성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동안 우리가 만들어낸 이 ‘넝마’를 입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재단한 사람은 따로 있지만, 이 옷을 입고 나간 나들이와 늦은 퇴근길의 기억은 오롯이 여러분의 것이다.
인스타그램에서 지난 1년간 가장 많이 들은 곡에 대한 설문을 진행했고, 그중 많이 언급된 두 곡의 작업 비화라고 해야 할지, 트리비아를 준비했다. 당시에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원작자의 의도를 궁금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관련해서 질문 DM도 꽤 많이 받았지만… 다소 매몰차게 답변을 거절했던 것 같아 죄송하다. 나나 쿤디 씨의 의중보다 청자 개개인의 경험이 훨씬 중요하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글은 그냥 김라마라는 또 다른 (창작자이자) 청자의 신변잡기 정도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다.
편한 자리에 적당히 주저앉으시라, 그날의 무용담을 풀어볼 시간이다.
일단, 두 번째로 많이 언급된 건 9번 트랙 ‘모험’이다.
- 모험은 앨범 순서상 거의 끝에 있지만, 첫 데모는 전체 작업 초기에 나온 곡 중의 하나이다.
- 원래 마지막 곡으로 생각했던 곡이기도 하다. 하지만 도중에 앨범 구성이 바뀌면서 모험으로 끝내기가 애매해졌고, 쿤디 씨가 아이디어를 내어 인스트루멘탈 트랙인 ‘전승’을 추가하였다.
- 곡의 테마는 던전 & 드래곤 같은 롤플레잉 게임에서 따왔다. ‘초록포션’도 그렇고, 은근 게임 레퍼런스가 많은 앨범이다…
- 일견 비슷한 구석이 없어 보이지만 게노야마시로구미(芸能山城組)의 AKIRA(1988) 사운드트랙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 후렴구와 벌스 2에선 까마귀의 날갯짓 소리를 퍼커션 세션처럼 사용하였다.
- 그 까마귀 소리는 내가 예전(약 7년 전)에 만들다가 만 곡에서 가져왔다. 그 곡에선 내가 랩도 하고, 무려 벌스가 3개나 된다. (그래서 버렸다)
- 이 곡에서 쿤디 씨가 쓴 벌스 2 가사는 내가 앨범 전체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쿤디 씨가 녹음 파일을 보내주셨을 때 적잖이 흥분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 실제 있었던 일가족의 비극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결국 아예 다른 줄거리를 가져갔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 전곡 타이틀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 곡이나 ‘송정맨션’을 단독 타이틀로 밀었을 것 같다. 사실 난 타이틀곡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영리한 소비 방식이다.
- 내가 만들었지만 랩하기 겁나 어려운 곡이다.
대망(?)의 1위는 4번 트랙 ‘초록포션’.
- 이 곡도 앨범 작업 초기에 나온 곡이다.
- 눈치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앨범 전체가 두 곡씩 짝지어져 있다. 그중 초록포션은 원래 3번 트랙 ‘돼지손’과 한 곡으로 내려고 했다.
- 메인 루프 자체가 돼지손 끝부분의 샘플링이다.
- 난 내 곡을 샘플링하는 방식으로 많이 작업한다. ‘수호천사’를 작업할 때는 아예 샘플링용으로 3~4분짜리 곡을 썼다. 그 곡 전체에 깔린 “우우우”하는 목소리도 나다.
- 난 술을 안 마신다. 주량 최고 기록은 천주교 세례식에서 마신 포도주 한 모금이다.
- 친한 사람들 술자리에 따라가면 맨정신으로도 잘 논다. 취한 상태가 디폴트인 게 아니냐는 말도 들어본 적이 있다.
- 아무튼 그렇게 주정뱅이들과 어울리고 관찰했던 것이 곡의 영감이 되었다.
- 곡 종반부는 The Beach Boys의 전설적인 곡 Good Vibrations 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 쿤디 씨에게는 가사를 더 멍청하게 써달라고 계속 주문했다. 초기 버전이 ‘바보 불고기버거’라면, 최종본은 ‘바보 콰트로 치즈와퍼’다.
- 내가 “이 정도로 멍청해야 합니다.”하고 참고용 벌스를 짜서 쿤디 씨에게 보내주기까지 했다. 거기서도 김라마가 랩을 한다. 부디 쿤디 씨가 그 파일을 지우셨길 빈다.
- 이 곡의 후렴구는 더블링 트랙까지 합치면 3000 테이크가 넘게 재녹음했다.
- 쿤디 씨 파트에서 “오늘 밤 따라갈래 누구의 피리”라는 가사가 나올 때, 뒤에서 “피리!”라고 외치는 사람은 나다. 마음만은 Takeoff였다…
- 곡 리듬 파트 전반에 내가 “포포포”라고 하는 소리가 깔려 있다. 포포포포포포포포퐆
이렇게 길게 적을 생각은 없었는데, 적다보니 장문이 됐다. 설문을 진행하면서 감사한 것은 생각보다 표가 많이 갈렸다는 점이다. 창작자로서 모든 수록곡이 골고루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만큼 기쁜 일도 없다. 이번에 언급되지 않았던 곡들은 또 다음에 얘기를 나눠봐야겠다. 그때를 위해서 여러분 옷장 한켠에 ‘넝마’를 위한 자리를 남겨주셨으면 한다.
고맙습니다.